쿠르트 리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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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르트 리슈카는 독일의 나치 친위대(SS) 장교로, 쾰른 게슈타포의 수장이었다. 1938년 수정의 밤 포그롬 이후 3만 명 이상의 유대인 수감 작전을 지휘했으며, 점령된 프랑스에서 유대인 대량 추방 사건의 책임자로서 3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 전후 독일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다가, 나치 사냥꾼들의 추적 끝에 1978년 체포되어 1980년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석방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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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리슈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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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쿠르트 리슈카 |
원어 이름 | Kurt Lischka |
출생일 | 1909년 8월 16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브로츠와프 |
사망일 | 1989년 4월 5일 |
사망지 | 서독 브륄 |
범죄 정보 | |
유죄 판결 | 전쟁 범죄 |
형벌 | 종신형 (1955년) (결석 재판) 10년형 (1980년) |
유죄 판결 상태 | 해당 없음 |
SS 복무 정보 | |
복무 기간 | 1933년–1945년 |
별칭 | 해당 없음 |
충성 | 나치 독일 |
계급 | SS-중령 (Obersturmbannführer) |
병과 | 슈츠스타펠 |
부대 | 게슈타포 수장 |
지휘 | 해당 없음 |
2. 생애
쿠르트 리슈카는 독일의 SS 중령이자 게슈타포 요원으로, 나치 독일 점령 하 프랑스에서 유대인 박해 및 추방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전범이다. 법학을 전공한 후 나치당에 가입하여 SS와 게슈타포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파리 SiPo-SD 책임자로서 수만 명의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데 관여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잠시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어 서독에서 오랫동안 처벌받지 않고 생활했으나[2], 나치 사냥꾼들의 끈질긴 추적 끝에 결국 체포되어 전쟁 범죄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4] 그는 복역 중 건강 문제로 석방된 후 사망했다.[3]
2. 1. 나치 독일 시기
리슈카는 은행원의 아들로, 브레슬라우와 베를린에서 법학 및 정치학을 공부했다. 학위를 취득한 후 브레슬라우의 지방 법원과 고등 법원에서 일했다. 리슈카는 1933년 6월 1일에 SS에 입대하여 1938년에 SS 소령 계급에 올랐고, 1942년 4월 20일에는 SS 중령으로 진급했다. 1935년 9월 1일, 리슈카는 게슈타포에 합류했으며, 1940년 1월에는 쾰른 게슈타포의 수장이 되었다.리슈카는 1938년 11월 9일부터 10일까지 유대인 재산 대량 파괴 사건인 ''수정의 밤'' 포그롬 직후 3만 명 이상의 독일계 유대인을 수감하는 작전을 지휘했다.
파리 SiPo-SD 책임자로서 리슈카는 점령된 프랑스에서 유대인 대량 추방 사건의 책임자였다.[1] 1942년 프랑스에서 유대인 강제 수용소 이송을 책임졌으며, 이 과정에서 3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2. 2. 전후
리슈카는 1945년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투옥되었고, 1947년 전쟁 범죄 혐의로 체코슬로바키아로 인도되었으나 1950년 8월 22일에 석방되었다. 그는 서독에 정착했다. 파리 법원에서 그에게 부재중으로 종신형을 선고했지만, 리슈카는 25년 이상 자유롭게 살면서 서독에서 판사를 포함한 여러 직책을 맡아 자신의 이름으로 일했다.[2] 당시 독일 국내에는 잔류하는 나치스 전범을 단속하는 법률이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실명을 숨기지 않고 쾰른에 거주할 수 있었다.프랑스 변호사이자 나치 사냥꾼인 세르주 클라르스펠트와 그의 아내 베아트 클라르스펠트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거주 유대인에 의한 전쟁 범죄 추적 조직(나치 헌터)[4]은 리슈카의 행적을 추적했다. 이들은 길거리에서의 납치 미수 사건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리슈카를 파리로 이송하려 시도했지만, 이송의 근거가 되는 법률이 없어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 법이 정비되면서, 리슈카는 1978년 독일 경찰에 의해 쾰른에서 체포되었다. 1980년 2월 2일, 그는 쾰른에서 재판을 받고 다른 두 명의 전직 게슈타포 요원과 함께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함께 기소된 인물은 파리의 친위대 경찰청장의 개인 비서였던 헤르베르트 하겐과 파리 게슈타포의 "유대인 문제" 부서에서 일했던 에른스트 하인리히존으로, 하인리히존은 6년형을 선고받았다. 리슈카는 1985년 건강상의 이유로 조기 석방되었고, 1989년 4월 5일 브륄의 한 요양원에서 사망했다.[3] 리슈카는 1942년 프랑스에서 유대인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이 과정에서 3만 명이 넘는 유대인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조
[1]
학술지
Vichy France and the holocaust
1997-05
[2]
서적
Who's Who in Nazi Germany
Routledge
2002
[3]
서적
French Children of the Holocaust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6
[4]
학술지
セルジュ・クラルスフェルト作『フランスのショア』をめぐって
http://id.nii.ac.jp/[...]
加計学園倉敷芸術科学大学
20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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